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Downsizing Democracy
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지음), 서복경(옮김),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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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정치(政治)란 무엇일까?’
이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정치학 관련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더구나 내가 정치에 대해 알아가는 속도보다 한국 사회가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가에 대해 기술할 필욘 없다. 정권의 나팔수 비슷하게 변해버린 주류 언론의 눈에도 한국 사회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일 정도이니까.
그렇다면 단 두 정권 만에 이토록 퇴보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만 퇴보라고 여기는 것일까? 슬프게도 나는 '나만 퇴보라고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 생각, 한국 사회는 절망적일 정도로 퇴보하고 몰락해가고 있다는 현실 인식은 지극히 소수에게만 공유되고 전파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책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읽으면서 더 강화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개인이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 대부분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절망적인 것이다. 한국 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것이다. 정치 시스템의 문제, 잘못된 정책이나 정치적 의사결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 시스템, 정치 리더들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인해 생긴 문제라고 여기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왜 정치가 엉망이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그 해결책이나 실천을 고민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소수마저도 가난의 문제를 비껴서 생각하고 실천한다는 점은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좀 긴 인용이 되겠지만, 저자들의 인식은 정확하다.
미국 주류 자유주의 최근 경향은 ‘탈물질주의’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을 인도하는 강력한 공적 이념과 짝을 이루는 민간의 이념이다. 탈물질주의는 특수 이익의 지저분한 난투극을 초월한 양, 허공에 붕 뜬 채로 삶의 질을 강화하는 데 시선을 둔다. 이때 많은 경우 경제적인 사안은 고려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래와 야생동물 보호, 여성의 선택권 보장, 자존감의 형성, 에너지 보존, 정치 자금 제도 개혁에는 찬성하고,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 근본주의적 불관용, 해양굴착, 동성애자 배척, 총기 사용 규제 완화 로비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지지자들은 저마다 나름의 고상한 명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명분들은 대부분 ‘고상하다’. 하지만 그것은 풍족한 사람들의 명분이다.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다. (…) 중도좌파가 공공정책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혜택에 관심을 갖지 않을 때, 이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침묵하는 시민들(빈곤층 뿐만 아니라, 제조업이 쇠락하고 고등학교 졸업장이 더 이상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지 않는 경제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노동계급 가정들)과도 멀어졌다.
- 414쪽 ~ 415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때 ‘탈정치화’니 ‘탈역사화’니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수입하고 번역, 전파하던 일군의 인문학자들과 그들의 학생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느끼게 할 정도로 정치적 발언을 하며 진보적인 학자나 그들의 저서를 소개하는 이들이,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학자들까지 칭찬하며 소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 입장과 학적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솔직히 말해 지적으로 허술하며 현실에 대한 책임감마저 없음을 드러냈지만, 이와 상관없이 대중들에게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애초에 현실에 대한 무책임함과 천박한 상황 인식 하에 ‘비판적이고 선진국적인 학자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강남좌파’라는 단어도 떠올렸다. 이 단어는 ‘강남 = 우파’에 대응해 만들어졌다. 아마 강남에 거주하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야당 지지자들을 위해 급조된 단어처럼 보이지만, 강남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강남좌파들은 결정적으로 가난을 비껴서 있다. 이들이 관심 가지는 것은 미국 자유주주의자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익 봉사나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겠지만 그들도 ‘탈물질주의’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학자도 아니고 강남에 거주하지도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내가 만나고 교류하는 이들 대부분은 서울이나 수도권, 혹은 해외대학을 나와 스스로 진보적이라 여기는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직장인들이다. 난 이미 닫힌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다른 생각, 다른 환경, 다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환경도 없고 그런 환경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생각도 없거나, 만들기 위해 내가 감소해야 될 정치적, 경제적 위험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나도 이미 ‘탈물질주의’화된 셈이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일도, 그들과 대화할 일도,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봉사할 수 있고 세상이 그런 것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시스템의 문제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 문제가 되었다. 이는 복지의 문제와도 다른 것이다.
* *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이 문장을 읽고 난 다음 다소 놀라웠다.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나온 발언인데, 과연 그럴까? 세월호 이후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저 문장은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다. 국가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최근 수십년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은 시민에서 ‘고객customer’이라고 불리는 존재로 변해왔다’고 지적한다. ‘교육수준의 상승과 정치참여의 하락’이 서로 결합되었음을 분석한다.
개인민주주의는 집단적 공격으로만 돌파할 수 있었던 정치의 장벽을 낮춘다. 정보의 자유, 정보공개법, 공청회 의무화, 입법 예고제와 공개 설명회 규정, 위원회 등의 ‘시민’ 대표 할당제, 공공기관의 ‘전화상담서비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복지 서비스 등 이 모든 것과 기타 정책들은 시민들이 혼자서 정치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견 상 시민 친화적으로 보이는 개인민주주의의 이런 장치들이 갖는 주된 효과는 미국에서 시민의 역할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 43쪽
이제 이 사회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 집단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단 행동의 정치적 파급력도 위축되어 설녕 집단 행동이 있었다고 한들 정부나 정치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언론은 이미 언론의 사명이나 진실이니 하는 걸 버린 지 오래 되었다. 그러니 고객이 된 시민들이 두드릴 수 있는 곳은 청와대 신문고나 공공 기관의 민원 게시판, 또는 다음 아고라다.
애초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만든 것이지만, 도리어 정치적 무관심을 만들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을 지지하지도 정당 사무실을 나가 정치인을 만나지도, 사람들을 모아 시위를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다수의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비슷하게 ‘정치엘리트들도 유권자를 동원하지 않고도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할 방법을 찾았다’. 도리어 높은 투표율은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고객이 된 시민들도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의 효과는 거의 없고 민원 게시판의 효과는 직접적이다. 그 효과가 더 큰 것은 소송이 될 것이다.
1970년대 ‘새로운 정치’에서, 그런 상상된 유권자 집단들은 공익단체라는 형태로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공익단체에 대한 대중의 참여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거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행정기관을 접촉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 아래 공익단체는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 한정된 유권자 집단을 동원하지 않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다.
- 148쪽 ~ 149쪽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시민 집단을 상상적으로 구성한다. 하지만 그 속에 속한 시민들은 그저 메일링리스트로만 존재한다. 실제 만날 일도 없고 만나지도 않는다. 온라인 공간이 있으며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도대체 시민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시민들은 여론 조사 속에 숨어 있었다.
2억 5천만 미국인의 의견을 반영했다는 설문조사는 겨우 무작위로 추출된 응답자 2~3천명의 인터뷰 결과일 뿐이다. 나머지는 통계적으로 또는 ‘가상적으로’ 대표된다. 그들은 인터뷰의 불편함조차 견딜 필요가 없는 것이다.
- 190쪽
수학적으로 옳을 진 모르지만, 그것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우긴다.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한다.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통계학자들은 여론 조사를 ‘참견하는 측정 obtrusive measure’이라고 부른다. 여론조사는 단순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의 연속성과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론조사는 개인의 의견을 모으는 방식을 정의한다. 예컨대 여론조사에서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의견 간에 비중의 차이가 없다. 또한 여론 조사자들은 여론이 판단해야 할 주제를 선택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문 조사로 기록되는 데이터는 ‘순수한’ 여론이 아니라, 여론을 가진 사람과 여론조사자의 상호작용이다. 설문조사가 여론을 측정하는 동시에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189쪽 ~ 190쪽
여론조사에 대한 저자들의 견해를 조금 더 인용해본다.
여론조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들어주기 원하는 바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시민의 의견 가운데 듣고 싶은 것을 말해준다. 그 결과, 여론조사는 여론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설득하는 과정의 한 단계로 자리잡는다. 여론조사는 여론 관리를 위한 도구인 것이다.
- 195쪽
여론조사를 통해 너무도 신중하게 걸러진 이런 가상 시민들의 견해에는, 한때 여론을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만들었던 특징들이 빠져 있다.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은 수의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 묻혀 버린다. 집단과 집단성은 개체화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된다. 마침내 시민은 고객의 지위에 걸맞게, 의뢰자의 설득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여론 조사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 변방에 갇힌 이들 가상의 시민은 참여하도록 초대받지 못한 채 정치투쟁을 그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198쪽
이 책의 상당 부분은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앉은 민주주의와 '정치동원political mobiliztion'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왜 미국 민주주의가 나빠졌는가'를 분석한다. 놀라울 정도로 한국 민주주의와 닮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했다. 2004년도에 나온 책이니, 10년이 지난 셈이다. 국내 번역된 건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물질적 필요가 너무 중요하고 절실해서 탈물질주의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정당이 보내는 우편 목록에조차 이름이 올라 있지 않고, 투표하지 않아도 굳이 관심 가져 주는 이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이익집단으로부터 초대받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해 진행되는 집단소송의 원고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 있지 않으며, 그저 여론조사로 대표되는 가상적 시민virtual citizen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또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애국적 열정을 간직하고 있고, 이따금씩 역사에 나타나는 '열정의 순간'을 함께 하지만, 곧 부모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
- 역자 후기, 443쪽
가상적 시민으로만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하는 건 일종의 계몽주의일까.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은 이 책을 읽고 그들의 전략을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 속에 평범한 사람들은 속해있지 않다. 몇 백년 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실은 지금 한국 민주주의에 정치는 없고 통치만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 책의 내용으로 한국사회를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조차 한국 사회에는 너무 과분한 일일지도 모른다.